유럽 역사를 바꾼 여인의 사랑

(사진=뮤지컬 '라 카바'(la Cava) 포스터)


나는 뮤지컬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안 보는 편이지만 지금도 가끔 다시 보고 싶은 게 있다. 벌써 십여 년 전 런던 피카디리 극장에서 본 ‘라 카바’다. 약간 길지만 같이 나누고 싶어 써 본다.

 

막이 오르면 장엄한 스페인 풍의 군가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면서 장면은 에스파냐 톨레도 성과 훌리안(Julian Estorias) 백작의 배 안을 보여준다. 유럽의 마지막 고트(Goth) 족 왕이었던 로데릭(Roderic)이 통치하던 시대이다. 잘 알다시피 고트 족은 로마제국의 국운이 쇠해지던 3세기경에 동쪽으로부터 들어와서 로마인들에게는 야만인 취급을 받았지만 결국 서로마제국의 멸망시키고 서쪽으로 이동해 오는데 이 뮤지컬의 배경이 되는 8세기 초에는 지금의 스페인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고 모로코에 해당하는 아프리카 북부 체우타(Ceuta)를 200년 이상 식민지로 다스리고 있었다. 당시 체우타에는 무어(Moor) 족이 있었는데 그 족장인 지브릴 타릭(Gibril Tarik)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많은 무사들을 훈련시켜 여러 번 에스파냐 병영을 습격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체우타의 총독으로 있는 훌리안 백작은 로데릭 왕과는 죽마고우로 형제 같은 사이였다. 왕권 다툼 때 전왕 위티자를 같이 내몰고 권력을 잡은 터였지만 신하로서 왕에 대한 예의도 잃지 않고 지낸다. 그는 교육과 안전을 위해 무남독녀인 외딸 플로린다(Florinda, 695–740)를 톨레도로 보내 왕에게 맡겨 궁에서 지나게 한다. 그녀의 나이 겨우 16살 때이다.

플로린다에게는 소말(Somal)이라는 장래를 약속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로데릭 왕의 노여움을 사서 죽는다. 복수를 다짐한 어린 플로린다는 일부러 왕에게 접근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내시 아곤(Agon)과 주교(후에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을 받음)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몇 번 만나면서 그녀는 자기의 원수이지만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한 로데릭 왕을 짝사랑하게 된다.

 

플로린다는 유럽의 역사를 바꾼 다섯 여인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 외의 네 여인들은 클레오파트라와 네로 황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Agrippina), 불란서와 영국 두 나라의 여왕 노릇을 한 엘레아노(Eleanor, 1122–1204)) 여왕, 그리고 헨리 8세의 부인으로 영국 성공회를 탄생시키게 한 앤 볼레인(Anne Boleyn, 1501–1536) 정도이니 그녀가 유럽의 역사에 얼마나 큰 획을 그은 여성인가 쉽게 알 수 있다.

 

로데릭 왕은 처음에는 물론 그녀를 그저 딸처럼만 생각하지만 계속되는 젊은 여인의 사랑을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질투심 많고 이미 애정이 식어버린 왕비에 대한 반감도 일부 작용한다. 그리고 이제 둘은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다시 무대가 체우타의 훌리안 백작의 숙소로 바뀌고, 그는 분노에 떨며 ‘친구의 딸을 강간한 놈을 용서할 수 없다’며 절규한다. 그는 어떻게 자기 딸이 왕과 가깝게 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듯했다. 무대가 다시 바뀌어 왕과 플로린다의 ‘스무 밤’이란 노래가 끝나면 어두운 밤의 북 아프리카 사막이 나온다.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훌리안은 결국 복수를 위해 적의 우두머리인 지브릴을 찾아간다. 적인 고트족 총독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지브릴은 당황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둘이서 같이 ‘What would you do for your child?”라는 노래를 부른다.

 

711년 말경 지브릴은 7천 명의 아프리카 군을 이끌고 훌리안의 안내로 지금의 지브롤터(지브릴 타릭의 이름을 땄음) 해협을 건너 에스파냐로 쳐들어 온다. 이렇게 무어족의 습격을 당한 톨레도 왕궁은 변변한 대응도 못해보고 멸망한다. 와중에 로데릭 왕은 훌리안의 칼에 쓰러지고 죽어가는 왕을 끌어안고 울고 있는 플로린다의 처량한 모습이 오랫동안 계속된다. 그리고 훌리안과 플로린다의 합창 ‘피날레’로 막이 내린다.

 

이 뮤지컬은 어떻게 아랍이 유럽에 거점을 확보하게 되는가를 가르쳐 줄 뿐 아니라 당시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사상이나 문화 같은 것을 막연하게나마 알게 해 주는 매우 교육적인 내용이어서 소일거리로 갔던 나에게는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무어인의 이베리아 점령은 1492년까지 계속되면서 중세 암흑기 유럽에 찬란한 문명을 전하다가 결국 자기들이 가르쳐준 화약제조법 때문에 도로 아프리카로 쫓겨오게 되지만 코르도바(Cordoba)를 중심으로 했던 도시 문명은 유럽이 현대화하는데 그 기초가 되었으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요즈음 코르도바를 비롯한 중부 스페인으로 관광을 가는 분들이 많아 참고가 되시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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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대 정년퇴임 후 서울여대 치료전문대학원 객원교수로 10년간 ‘성학’을 강의했다. 아태폐경학회연합회(APMF), 한국성문화회, 대한성학회 등의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국제심신산부인과학회(ISPOG) 집행위원, 대한폐경학회 회장, 대한심신산부인과학회 회장 및 세계성학회(WAS) 국제학술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단기고사는 말한다>, <사춘기의 성>, <성학>, <섹스카운슬링 포 레이디>, <시니어를 위한 Good Sex 오디세이> 등 다수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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